월급 쪼개 등록금 내주고, 자식보다 제자 보살핀 이성호 경희대 교수
부모- 친구같은 스승 잃은 제자들, 애절한 추모문집내고 장학금 모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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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갑자기 떠났다. “안녕”이라는 인사 한마디 없었다.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설 것 같은 스승을 기다리며 제자들은 강의실에서 한없이 기다렸다. 그리고 스승이 오실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스스로에 이해시키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지난 2007년 10월 29일 새벽, 여느 때처럼 출근 준비를 하던 이성호 경희대 회계학과 교수는 며느리에게 “얘야, 내가 가슴이 아프구나”라고 말했다. 잠이 안 와 책을 읽다가 털고 일어난 참이었다.
“여보, 몸도 아픈데 오늘은 쉬세요.” 옆에서 부인이 말리고 나서자 이 교수는 화를 냈다. “내가 살아있는데 어떻게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있소?” “그러면 출근해서 틈나는 대로 경희의료원에 꼭 가보세요.” “알았어요.”
그것이 가족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오전 7시50분 연구실로 출근한 이 교수는 오전 9시 사회교육원 강의를 준비하다 가슴 통증과 호흡곤란으로 동료에게 대신 강의를 부탁한다. 그리고 잠시 안정을 취하다 경희의료원을 찾은 것이 오전 10시 30분, 여러 검사와 응급 치료를 받던 오후 3시25분 이 교수는 끝내 숨을 거뒀다. 향년 63세. 급성 심근경색증이었다.
대학이 거대한 취업학원으로 변한 오늘, 이 교수는 ‘이상한’ 교수였다. 교수가 아닌 자상한 중-고등학교 교사, 그것도 담임선생님에 가까운 교수였다.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했다. 절대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제자들의 속내를 정확히 일고 있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 가정문제로 속앓이 하는 아이, 심지어는 연인과의 헤어짐으로 겪는 아픔까지 헤아리고 다독거린 교수였다.
그는 어려운 회계학 강의를 하며 학생들에게 자주 시를 낭송해줬다. 그리고 때론 나이답지 않은 감성으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회계학과 시(詩)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그는 아이들의 실력만큼 감성의 크기도 함께 자라게 하려고 노력하는 교수였다. 아니, 그 자신이 문인이기도 했다. 이 교수는 2001년 ‘나는 회계학시간에 시를 읽는다’는 에세이집을 펴내기도 했다.
가장 행복한 교수는? 정답은 모교에서 후배를 가르치는 교수이다. 제자이자 후배와의 만남은 각별한 행복을 선물한다. 이성호 교수가 그런 사람이었다. 1968년 경희대 상대를 졸업한 이 교수는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치고 귀국, 1987년부터 모교 회계학과에서 후배들을 제자로 가르친다. 20년간 그는 강단에서 행복했다. 하지만 그는 남달리 자신의 행복을 제자들에게 나눠준 사람이었다. 아낌없이 받은 그 이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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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강의 생활 그의 출근은 늘 새벽이었다. 지난 1996년 7월 공인회계사반(청현재) 지도교수를 맡고부터는 출근이 더 당겨졌다. 퇴근 시간은 아예 없었다.
밤늦게까지 불이 켜있는 연구실. 제자들은 그 늦은 시간까지 불 켜있는 스승의 방을 보며 더 자신들을 담금질했다.
한 학생은 자정 무렵까지 불이 켜져 있는 이 교수의 방이 궁금해 망원경으로 엿보기도 했다. 망원경 너머의 이 교수는 책상에서 그 학생이 낮에 치른 쪽지시험 답안을 일일이 첨삭하고 있었다. 가끔 답안지 옆엔 이런 글도 남겼다. “어머니 생신 축하한다.” “네 자취방 도배 새로 해야겠더라.”
매일 아침 저녁 공인회계사반에 들러 출석 확인을 하고 모습이 안 보이는 제자의 자리엔 ‘러브레터’를 남겼다. “*시 *분에 출석체크를 했으나 자리에 없었다”는 내용과 함께 그 밑엔 “힘들어도 참고 열심히 하라”는 격려가 때론 엄한 꾸지람이 꼭 적혀있었다. 공휴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인회계사 시험을 망친 제자가 잠적하면 이 교수는 자취방과 단골 당구장까지 쫓아가서 잡아왔다. 한 제자는 회계학과 4학년이던 1990년 봄, 공인회계사 시험에 낙방한 뒤 한 학기 동안 청현재에 발길을 끊었다. ‘집안 형편도 어려운데 가망 없는 시험에 매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자괴심 때문이었다.
그가 다시 이 교수에게 붙들려 청현재에 돌아간 날, 이 교수는 불호령을 기다리며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에게 75만원을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곤 말했다. “우선 등록금부터 내라. 생활비도 내가 마련해 볼테니 포기하지 말아라.”
이 교수 역시 형편이 넉넉한 처지가 아니었다. 유학 역시 졸업 후 은행원 생활을 해서 모은 돈으로 갈 수 있었다. 서울 청량리동의 99㎡(30평) 아파트가 재산의 전부였고 승용차도 휴대전화도 없었다. 이 학생은 결국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다.
공부 틈틈이 그는 제자들과 술도 열심히 마시는 교수였다. 술자리에서 그는 동문 선배였고 제자들은 후배였다. 소주잔 기울이며 인생을 얘기하고 시를 얘기했다. 그의 말대로 그에게 학생들은 제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식이고 친구이며 애인이기도 했다. 군에 입대한 제자에게 그는 직접 편지를 써 보내고 때론 먼 강원도 산길을 달려 면회를 가는 ‘애인’이기도 했다.
이 교수의 사랑은 또 학생들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졸업을 한 제자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강원도에서 노점상을 하는 제자의 어머니에게 자주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술이 얼큰하면 그 어머니를 걱정하며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마냥 사랑만 베푼 것도 아니었다. 게으른 학생들에게 그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는 저승사자처럼 두려운 것이었다. 운동권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고 기물을 부술 때면 그들에 맞서서 당당하게 꾸짖는 스승이었다. ‘어용’ 소리를 듣고 심지어 학생들에게 폭행을 당하면서도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열정이 식지 않은 올곧은 스승이었다.
지난 2월 5일 회계학과 졸업생 70여명은 이성호 교수의 이름을 딴 장학기금을 만들어달라며 학교 측에 현금 1억3000만원을 전달했다. 공인회계사 시험 준비반 출신 졸업생이 중심이 되어 생전 본인 자식보다 제자들을 더 끔찍이 생각했던 이 교수의 ‘스승 사랑’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어서였다. 이들은 경영대 건물 안에 이 교수의 이름을 딴 강의실을 만들어 달라며 요청했고 학교 측은 신축한 경영대 오비스홀 422호를 ‘이성호 교수 강의실’로 이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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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제자들은 자신들을 위해 가난한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면서 열정과 사랑을 쏟았던 한 스승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한다.
그렇게 큰 사랑과 관심 쏟으실 때
당신의 건강도 그 애정의 절반만큼만 돌보셨다면
이렇게 떠나시지는 않았을텐데
언젠가 저희와 술 한잔 기울이시며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미소 지으시며
자신은 많은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걸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독하게 학생들을 다그치기도 하고
후한 칭찬 한번 못해줘도
나 같은 이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주는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었으면 하신다고.
이성호란 이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란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가슴 아렸었는데
교수님!
교수님을 기억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있음을 지금 보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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