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일 화요일

북한에 속았던 오길남 박사 `내가족을 돌려다오`

독일 유학중 자진입북, 주제사상교육 받고 대남방송
"학생 포섭"지령에 유럽도착후 탈출, 피맺힌 후회 25년
가족은 수용소에..."병약한 아내,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화유 재미 언론인

 

"내 아내와 두 딸을 돌려보내다오!"   

피맺힌 절규와 후회로 보낸 세월 25년

자진 입북했다 환멸느끼고 탈출한 경제학박사 오길남 WP紙 회견

악명높은 북한 15호수용소에서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소식도 몰라

   부산고등학교와 서울대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튜빙겐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경제학자 오길남(67). 그는 오늘도 북한 정권을 향해 "내 아내와 두 딸을 돌려보내달라!"고 25년째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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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포스트 2월22일 오길남박사

(왼쪽) 인터뷰기사와 가족사진.

 

 
 
2월 22일자 워싱턴 포스트 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와 필자가 개인적으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오박사는 1985년 재독 친북인사들을 통해 북한당국으로부터 입북하면 독일 경제학박사에 걸맞는 일자리를 주고,  부인(신숙자/파독 간호원 출신)의 간염을 무료로 특별히 치료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두 딸(당시 초등학교 학생)을 데리고 평양으로 들어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부인은 한사코 입북을 반대했으나 오박사는 강행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를 거쳐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오박사 가족은 전부 평양 인근 산속의 군부대로 끌려갔다. 그때부터 오박사는 입북을 후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약속한 부인의 특별 치료도 받지 못하고 오박사 부부는 몇달동안 김일성 주체사상 교육만 매일 받았으며, 그것이 끝난 후에는 대남선동방송에서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대학에서 경제학 강의를 할 것으로 기대했던 오박사에게 대남선동방송을 하라니, 그는 기가 막혔다.
강요된 방송활동을 하고있던 중 오박사에게 새로운  지령이 떨어졌다.
독일로 돌아가서 남한 유학생들을 포섭해서 북한으로 데리고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물론 가족은 인질로 잡아두었다.

오박사가 집을 떠나며 유학생들을 포섭해서 평양으로 돌아오겠다고 하자 부인은 "당신은 양심상 그럴 사람이 못되고 그런 짓을 해서도 안된다"며 독일에 들어가거든 다시는 입북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당신 가족은 다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이 생지옥 같은 북한에는 다시 들어올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북한 공작원과 함께 독일로 돌아가기 위해 항공편으로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 기착했을 때, 오박사는 부인의 말대로 탈북을 결심하고, 공항에서 덴마크 당국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그는 미국 CIA요원에게 인계 되었고 독일 뮌헨에서 CIA로 부터 조사를 받았다.

한편 북에 남은 부인과 두 딸은 악명높은 제15호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석방된 후 북한을 탈출한 북한인들 증언에 의하면, 이 수용소는 굶주림, 구타, 강간, 그리고 공개처형등 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북한에는 이런 수용소 6개에 약 15만4천명이 수용되어있는 것으로 남한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용소는 2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하나는 얼마 동안 고생을 시킨 뒤 석방시켜줄 사람들을 가두는 "교화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키는 "완전통제구역"이라는데, 이곳에 들어간 사람은 과로와 영양실조, 질병으로 대개 50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다.

 오길남 박사는 Amnesty International(국제사면위원회)로부터 1988년경 자신의 가족이  완전통제구역으로 이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만일 그의 가족이 수용소에서 석방되지 않았다면, 두 딸은 몰라도 병약한 부인은 이미 사망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오박사는 1991년 재독 친북한인사들을 통해 딱 한번 수용소에 수감되어있는 가족 사진과 부인의 친필 편지, 그리고 두 딸의 육성 녹음테이프를 입수했다고 하는데, 이 테이프에서 두 딸들은 아빠가 보고싶다고 울먹였다 한다. 북한당국이 이 편지와 사진을 보낸 이유는 오박사의 재입북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오박사는 서울에서 북한관련 연구기관에서 오랫동안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은퇴, 한 아파트에서 혼자 쓸쓸히 살고있다. 
그는 워싱턴 포스트 특파원 블레인 하든 기자에게 "I am fool."이라고 말하고,  헛된 꿈을 가지고 북한에 가족을 데리고 들어간 자신의 결정을 뼈아프게 후회하며 생사조차 모르는 가족 생각에 눈물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토로했다. (워싱턴에서 조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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