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차 콜로퀴엄에서 이스라엘 건국자 벤구리온과 비교
이스라엘엔 벤구리온 공항-대학-기념관등 수두룩
이승만은 문집조차 흐지부지, 동상도 책도 한권 없어
최유경기자
우남이승만연구회는 19일 제 54차 콜로퀴엄을 열고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의 건국자인 이승만과 데이비드 벤구리온을 비교 분석했다.
서울대 법대 교수이자 한국인물전기학회장을 맡고 있는 최종고 교수는 “1948년, 같은 해 건국된 두 나라를 이해하려면 건설자의 생애와 사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며 “정확한 역사는 정확한 전기(傳記)의 집적(集積)”이라고 전했다.
최 교수는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아닌 초대 수상이었으나, 이스라엘에서 대통령은 국가의 상징일 뿐 건국에는 벤구리온의 역할이 더 두드려졌다”고 평가했다. 벤구리온은 농업인, 학교교사, 신문기자 등으로 활동영역을 넓히며 미국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8년 유대땅에 이스라엘 건국을 주도, 초대 수상 및 국방장관이 됐다. 이후 1953년 정계에서 은퇴했다가 스파이 사건으로 정치에 복귀, 다시 선거에서 승리해 수상과 국방장관을 지냈다.
최 교수는 “이스라엘 국가의 성립은 선민의식의 강한 의지의 소산이며 냉전체제의 부산물”이라고 평가했다. 1948년 5월 15일 18년 간 위임통치를 해오던 영국이 철수를 하던 당일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했다. 미국은 즉시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 아랍국가들과 분쟁이 있을 때 마다 지지해오고 있다. 유대계 미국인들은 막대한 무기와 자원을 이스라엘에 지원, 65만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사는 74만 명의 아랍인을 축출했다.
서울대 최종고 교수가 이승만과 벤구리온,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의 건국비교 발표를 하고 있다. ⓒ 뉴데일리
우남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1904년 러일전쟁 도중 감옥에서 쓴 책이다. 최 교수는 “러일전쟁은 일본이 서양세력에 승리한 최초의 전쟁으로 그 여세로 한국을 병합하는데까지 성공했다”며 “일본의 승리엔 유대인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러일전쟁의 발발이 알려지자 미국과 유럽으로 탈출한 유대인들은 박해를 가한 러시아제국이 멸망할 때가 왔다고 환호하며 대대적으로 일본을 지원했다”고 최 교수는 설명했다.
한국은 1919년 3.1운동이 좌절되자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최 교수는 “이승만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큰 희망을 걸고 파리평화회의에 한국의 자결권을 제의하기 위해 파리행을 추진했으나 윌슨은 열강의 세력균형을 위해 한국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최 교수는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1960년 9월 외교관계 수립을 논의하며 이룩한 것이 아닌, 한국전쟁 때 이미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한국전쟁 때 이스라엘이 직접 파병은 못 했으나 약 10만 달러에 이르는 원조를 해줬다”며 “오늘날에는 해마다 4만 명에 이르는 한국인이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 교수는 “벤구리온의 최대 정식적 지주는 유대주의”라며 “종교적 인간은 아니었으나 성서를 연구하고 지식인, 사상과 등과 많은 대화를 나눠 책으로 출간했다”고 전했다. 반면 이승만은 “유교적 전통에서 혁명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여 기독교 국가를 지향했으나 유교, 불교의 전통도 무시할 수 없었다”며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어땠는지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벤구리온의 유산으로는 벤구리온공항, 벤구리온대학이 있으나 이승만의 유산인 남산 동상마저 철거됐다”며 “‘이승만대통령담화문집’조차 완간하지 못하고 후일 대통령들은 자기 기념관, 문집 내기에 바빴다”고 비판했다.
“벤구리온에게는 여러 종류의 전기가 요즘도 읽혀지고 있으나 우남의 전기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쉽게 서점에서 사 읽을 수 있는 책이 한 권도 없다”며 “우남을 존경하고 추모하는 우리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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