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싸우다 전몰한 영규대사와 승병 800명의 순국은 지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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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나라를 위해 산화했지만 기록조차 지워진 승병들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김덕수 박사(대전대 정치대학원 강사)는 25일 오후 군인공제회관에서 열린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 총연합 창립 3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금산 700의총과 의승병’이란 주제발표에서 이같이 역설했다.
김 박사는 이날 발표에서 “임란 당시 선조가 한양을 떠날 때 백성들이 돌팔매를 하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며 “민심은 떠났고 부패한 벼슬아치들은 지신 보호에만 급급했으며 병사를 소집해도 모이지 않았고 설사 군사로 선발되어도 모면하려는 이들로 가득했다”고 유성룡의 징비록을 인용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이같이 절박한 상황에서 영규 대사가 1000명의 의승병 들을 이끌고 선봉이 되어 청주성을 탈환했다”며 “이에 감격한 선조가 승려 신분인 영구대사에게 파격적으로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리고, 단의(段衣) 한 벌을 상으로 내렸다”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영규대사 등의 금산전투에 대해 “영규대사는 의병장 조헌의 금산 진격을 극구 만류하며 전라감사 권율이 거느린 대군이 도착하거든 합세하여 적을 치자고 했지만 조헌 장군이 듣지 않았다”고 소개하고 “달걀로 바위 치는 격임을에도 조헌이 진격하자 뒤따라 금산으로 향했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영규대사는 휘하 승려들이 의아해 하자 ‘조헌은 충의의 선비일 뿐만 아니라, 우리와는 싸움터에서 생사를 같이 하였던 전우요, 동지이다. 생사를 같이한 동지가 죽음의 곳으로 떠나는데 어찌 내 홀로 살겠다고 보고만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영규 대사의 이같은 행동이 “의리를 생명같이 여기는 무인용사(武人勇士)와 의인열사(義人烈士), 쾌장부(快丈夫)의 풍모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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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조헌의 군사들은 들판 가운데서 적에게 포위당해 전멸하자 휘하 승병이 영구 대사에게 후퇴를 권했지만 대사는 ‘그들이 죽었다면 우리도 죽을 뿐이다. 어찌 구구히 혼자 살아남기를 바라겠는가’라며 적군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고 말하고 팔백 명의 의승군이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고 모두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금산의 왜적이 물러간 뒤에 의병장 조헌의 문인들이 칠백의병의 시체를 거두어 한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사총(七白義士塚)이라 하여 그 곁에 순의비를 세웠다”며 “그러나 팔백 의승들은 무덤도 없고 비석도 없어서 오늘날까지 금산의 그 격전지에는 칠백 의사총 만이 남아 있을 뿐, 팔백 의승군의 순국 사실은 그림자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다”고 안타가워 했다.
그는 “살신성인의 영규대사와 8백 의승을 국가적 차원 에서 연구, 보존, 추모해야 한다”며 “함께 영규대사 기념관을 만들어 귀감으로 삼아야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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